2009년 01월 21일
사람이 죽었다고. 사람이
예매한 워낭소리를 봤다. 슬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건 용산 철거민들의 죽음이었다.
대학 때 '법'에 관한 교양을 들었는데(민법인지, 가정법률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첫시간에 교수가 그랬다. 한자로 법(法) 자를 쓰면서 '법(法)이란 물(水)흐르는대로 가는(去) 것이라고. 자연의 순리가 법이라고.
벌써 10년도 지났지만, 난 그 말을 이제 이렇게 이해한다. 그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래서 '물은 낮은 곳부터 채운다' 그렇다면 법은 철거민 옆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소설 '난쏘공'에 나오는 말대로 그들(철거를 집행하는 사람들)의 편에 법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철거민들은 '불법 점거 농성'을 한 사람들이었고, 경찰 병력은 불법 시위와 무관한 '시민 안전'을 위해서 투입될 수 밖에 없었고, '유감스럽고, 가슴아프지만' 불법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고였다고 했다.
또 어떤이는 말했다. 거기에서 시위를 한 사람들 중엔 물론 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기심'으로 그곳에 시위하러 온 사람은 없었을까?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그들의 이기심이 더 클까, 건설사와 자본가들의 이기심이 더 클까?
또 어떤 이는 말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꾼'이 있었대" 또 어떤이는 말했다. "보상금 더 받으려고 그랬던 거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용산 구청의 표현대로 '생떼 쓰는' 사람들이라 치자. 재개발 주택이라 헐값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집, 몇 푼 안 되는 보증금과 넉 달치의 주거 이전비, 혹은 석 달치의 매출? 그걸 들고 그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또 다른 지역의 재개발 직전의 주택? 그들은 '살 곳'과 '장사할 수 있는 곳'을 원했다. 얼마의 '돈'이 아니라 '생활' 아니 '생존'을 원했다. 우리나라 헌법 35조 3항에는 "국가는 주택개발정책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래, 쾌적한 주거 생활. 죽어간 그들이 원했던 건 바로 그 '쾌적한 주거 생활'이었다.
그들이 왜 화염병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왜 새총을 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죽어갔는지를 물어달라고.
사람이 죽었다고. 사람이.
# by | 2009/01/21 20:56 | 트랙백 | 덧글(0)
2008년 11월 17일
물처럼
맞아, 내가 아는 하느님은 저런 하느님인데... 내가 기대했던 하느님은 저런 하느님이었는데, 싶었다. 하느님을 섬겨야 세상에서 승리하고, 예수를 영접해야 천국에 가고,- 이 말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 말고, 바로 저와 같은 말을 듣고 끄덕이고 싶었던 것 같다. 무언가 뚫리는 듯한 주말이었다.
또 그 간절함이야 이해하지만, 그리고 인간의 힘은 부족하기에 늘 그의 능력을 구해야겠지만,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100일기도를 하고, 배우자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헌금을 하고(실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하면 곳간을 더 많이 채울 수 있다는 식의 설교를 하곤 한다.), 그러는 것이 성황당에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기도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기도의 이유와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야학에 처음갔을 때, 교무교사가 물었다. 야학에 왜 왔냐고,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봉사'라는 말을 싫어했던 때였기에, 그렇게 말하면 좀더 나을 것 같았었는지... 그때 그 교무선생님은 나누기 위해 오지 말고, 함께 하기 위해 오라고 말했다. 그말의 차이를 처음엔 잘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차별이 필요하다." 는 말의 뜻을 '물'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이 똑같이 1mm씩 차오르지 않는 것처럼 낮은 곳에 더 많은 물이 필요한 것처럼, 차이가 있는 곳에 더 많은 차별(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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